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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연구

삼국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의 왕릉 제도
한반도에서의 무덤은 오래전부터 시작되었다. 그 처음은 석기시대에서 청동기시대까지 지속되었던 지석묘(고인돌)에서 찾을 수 있으며, 그것이 제도로 정립된 시기는 삼국시대부터이다.

삼국시대에는 고구려, 백제, 신라가 각기 고유한 장묘문화를 형성하였다. 고구려의 경우는 초기에는 석총(돌무지무덤), 중기부터는 토총(봉토분, 굴식돌방무덤)을 조영하였다. 석총의 경우 땅 위에 방형으로 돌을 쌓아 계단식으로 조성하기도 했으며, 토총에는 왕궁에 버금가는 지하궁전을 조성하기도 했다. 백제는 고구려와 같은 석총도 있는 반면 일반 봉토분도 등장하였고, 이는 봉토 속에서 석실이나 토축, 벽돌 중에 택하여 조성하였다. 신라에서는 지하에 무덤광을 파고 상자형 나무덧널을 넣은 뒤 그 주위와 위를 돌로 덮고 다시 그 바깥은 봉토로 씌운 적석목관분이라는 거대한 능이 만들어졌다. 통일신라시대에는 봉분이 남쪽을 향하고 석물과 석인이 등장하게 되었다.이 중 석사자(石獅子)를 네 모퉁이에 배치하는 것과 상석이 봉분 앞에 생기는 것은 중국에서 볼 수 없던 것이며, 석물의 형태 또한 통일신라 고유한 형식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이때까지는 왕릉이 평지에 입지하는 것이 선호되었지만, 통일신라 말기부터 풍수 개념이 적용되면서 능의 입지가 점차 산으로 향하게 되었다. 고려 왕릉들은 풍수를 살펴 산줄기가 능 뒤에서부터 좌우로 뻗어 내리고 명당수가 능의 뒤쪽에서 앞쪽으로 모여 흘러가는 지세를 택하였는데, 이러한 택지 원칙은 조선시대에도 기본적으로 계승되었다.

왕릉의 형식은 기본적으로 신라의 묘제를 근간으로 하고 있지만 망주석, 장명등, 정자각, 비각 등은 고려시대에 처음 등장하였다. 더불어 석사자, 석양, 석호들을 봉분 주위에 배치해 이전보다 훨씬 정교하게 능침을 조영하였다. 역사상 우리나라의 왕릉은 통일신라시대에 왕릉 형식의 기본이 이루어지면서 고려, 조선시대로 이어졌으나 그 독창적인 모습은 조선시대 왕릉에서 극명하게 나타난다.
조선왕릉의 복원 및 관리
조선 왕릉은 고려를 계승하면서도 능에 진입하는 방식이나 배치방식, 석물의 형태 등이 고려와 차이를 보이고 있으며, 『국조오례의』에 기초하여 조선왕조 내내 일관성 있게 왕릉의 형태를 유지하여 왔다. 조선시대의 왕릉제도는 원칙적으로 고려 말의 왕릉제도를 계승하고 있으나 시대적 자연관과 유교적 세계관 그리고 풍수사상 등에 의해 보다 특색 있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조선의 왕릉은 기본적으로 엄격한 예법에 의거하여 조성되었기 때문에 조성의 법식은 원칙적으로 고정되어 있지만 능역주변의 자연지형과 잘 조화 되도록 하며, 때로는 능주의 유언이나 능주의 생전 삶의 태도를 감안하기도 하고, 때로는 후손들의 의지나 시대적 정황이 개입되어 각 능마다 약간의 변화와 특징이 나타나기도 한다. 능의 전반적인 형태를 고려할 때, 그 변화의 과정은 크게 다섯 시기로 나눠볼 수 있다.
조선왕릉의 복원 및 관리 테이블 - 구분, 능호, 특징으로 구성
구분 능호 특징
1기 건원릉(健元陵) 고려시대의 양식을 계승
2기 영릉(英陵) 조선시대의 고유한 묘제가 정비, 독립된 양식을 반영
3기 광릉(光陵) 풍수사상을 더욱 강조, 간결화 된 능침공간
4기 원릉(元陵) 능침의 위계 변화와 간소화 된 상설체제
5기 홍릉(洪陵) 황제의 능으로 조성되어 능침의 상설체제가 변화
제1기는 고려의 능제를 기본으로 하며 일부 장명등, 망주석 등의 형태가 약간의 변화를 보이며, 제2기는 국가의 가례와 흉례 등을 다룬 『국조오례의』제정에 따라 조선시대 만의 독특한 장례문화에 따라 능역을 조성하였다. 제3기는 세조의 유교로 내부 방을 석실에서 회격으로 변화를 주었으며, 제4기는 영조대에 상례 제도를 다시 법제화하여 『국조상례보편』이 편찬되었는데 문무인(중계와 하계)공간의 구분을 없애고 석물의 크기를 실물 크기로 축소하는 등의 변화를 주었다. 제5기는 대한제국시기로 왕의 명칭을 황제로 변환하고 능제도 황제의 능으로 변화하여 석물을 침전 앞으로 배치하고 석물의 종류도 증가하여 설치하였다.
조선왕릉 건축물
정자각(丁字閣)
정자각 이미지
정자각은 왕릉제향을 위한 건물로, 정전(正殿)과, 배위청(拜位廳)이 결합한 丁자형 평면을 이루어 정자각(丁字閣)이라 부른다. 정전은 대부분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정면 3칸은 모두 문으로 이루어져 있고, 양 측면은 화방벽이 설치되어 있는 벽으로 되어 있다. 배면의 어칸은 신문(神門)이 설치되어 있으며, 좌우의 협칸은 벽으로 되어 있다. 배위청(拜位廳)은 정면 1칸에 측면 2칸으로 6개의 나무 기둥만이 세워지고 사방이 개방되어 있어서 제사를 지낼 때 움직임을 편하게 한다.

월대와 기단은 화강석 장대석을 쌓아 구성했으며 계단은 월대의 양 측면에 설치되어 있다. 동쪽 계단은 두 곳으로 나뉘며, 두 계단 중에 하나는 향로계(香路階, 운계)로 측면에 구름문양을 새긴 장식이 있는데, 향로라고 부르는 향을 모시고 가는 길과 이어진다. 임금조차도 이 계단으로는 오르지 못하고 그 옆 간소하게 꾸며진 어로계(御路階, 동계)를 이용한다. 서쪽 계단은 제사가 있을 때 수라간에서 준비한 음식물을 나르는데 이용되거나 제사가 끝난 후 축문을 태우기 위해 예감으로 축문을 들고 갈 때 사용한다.

가구는 정전이 5량가, 배위청이 3량가로 구성되어있으며, 공포는 대부분 익공식이다. 지붕은 기와지붕이며, 맞배지붕의 형태로 전면과 좌우에 풍판이 설치되어 있다. 지붕 제일 높은 용마루의 끝에는 장식기와인 취두가 설치되어 있고, 내림마루에는 용두와 잡상이 장식되어 있다.

조선왕릉의 정자각은 5칸 건물이 정형으로 알려져 있으나, 시기에 따라 정전의 좌우에 익각(익랑)을 달은 8칸 정자각(정전 5칸, 배위청 3칸)이 선택되어 지어졌다. 현존하는 8칸 제도의 정자각은 숭릉을 비롯하여 익릉, 휘릉, 의릉의 정자각이 있다. 지붕의 형태도 팔작지붕이 일부 사용되었으나 현재 남은 정자각은 대부분이 맞배지붕이다. 산릉도감의궤 등 문헌에 의하면 영릉(英陵), 강릉(康陵), 장릉(長陵), 영릉(寧陵)의 정자각이 팔작지붕이었으나, 후대에 모두 맞배지붕으로 교체되어 현재는 숭릉의 정자각만이 유일한 팔작지붕으로 남아있다.
비각
무덤 주인공의 표석(表石)을 놓고 이를 보호하기 위해 세운 것이 비각이다. 표석은 보통 1.5미터 높이의 장방형 돌에 주인공의 호칭을 새기고 간략한 이력을 적는데 하부에 받침돌이 있고 위에도 화강석으로 기와지붕 형태를 다듬어 올려놓는다. 비각은 보통 정면과 측면 각각 1칸의 간소한 규모이다. 벽의 하부는 전돌로 채워서 내구성을 높이지만 상부는 나무로 창살만을 내서 바람이 잘 통하도록 한다. 지붕은 기와를 얹은 팔작지붕이다.
보통 비각 안에는 표석 1개가 설치되지만 건원릉 비각에는 신도비(神道碑)와 표석 각 1개가 있고, 헌릉 비각에는 신도비가 2개 있다. 신도비는 능 주인의 생애와 업적 등을 상세히 기록하여 세우는데, 중국 진송 때 비롯되어 통일신라시대에 시작되었다. 현재 조선왕릉 내에 있는 신도비는 태조 건원릉 신도비와 태종 헌릉 신도비뿐이다. 이후 세종의 구 영릉 신도비까지 세웠다가, 단종대에 문종의 현릉을 조성할 때 신도비를 세우지 않았다. 이는 왕의 생애와 업적 등이 실록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현종 말년에 표석을 세울 필요성이 논의되어 1682년(숙종 8)에 조선왕릉 중 처음으로 효종의 영릉에 표석을 세웠다. 이후 숙종, 영조, 순조대에 신도비가 없는 왕릉에 모두 표석을 세웠다. 그 외에 비각이 2칸인 경우는 능 주인이 추존되었거나 쌍릉이나 동원이강릉 등 2명 이상의 왕과 왕비를 모실 때 표석을 따로 세워기 때문에 늘어난 현상이다.
수라간(水喇間)과 수복방(守僕房)
수라간은 제향이 있을 때 간단히 음식을 데우거나 조리를 하는 곳이고, 수복방은 능을 지키는 능지기가 임시로 머무는 곳이다. 일반적으로 수라간은 정자각 서남쪽에, 수복방은 정자각 동남측에 위치하고 있으며, 보통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으로 건축하였다. 수라간과 수복방은 18세기 중반까지는 2칸 규모로 조성되었으나 이후부터는 3칸규모로 조성되었다.
홍살문(紅箭門)
홍살문은 능역의 가장 아래쪽 정자각 남측 향로·어로가 시작되는 곳에 신성구역임을 표시하기 위해 세워놓은 문이다. 기둥을 양쪽에 세우고 위에 심방과 띠장을 가로지르고 가는 살을 약 15~24cm 간격으로 박고 중앙에는 삼지창과 태극문 등을 새긴 형태와 구조를 지니고 있으며 지붕은 달지 않는다. 홍살문은 이곳 외에도 능 동구 밖이나 기타 특별한 시설이 있는 곳에 세우며 그 크기도 위치에 따라 다르다. 동구릉의 경우와 같이 왕릉이 군집되어 있는 경우 능의 초입에 외홍살문이 있으며 각 능마다 내홍살문이 따로 있다. 이 경우, 외홍살문이 내홍살문보다 훨씬 규모가 큰 것이 특징이다. 홍살문의 형태에는 홍살의 가운데를 중심으로 좌우가 높아지는 ‘산(山)’자형과 같은 높이를 유지하는 ‘일(一)’자형이 있다. 홍살 사이의 간격은 조선후기로 갈수록 넓어지는 모습을 보이고 있으며 이것은 정자각의 규모가 커지면서 함께 나타나는 현상으로, 시각적인 균형감을 유지하고 있다. 붉은 창살이라는 이름처럼 홍살문은 좌우 기둥과 인방, 살 등을 온통 붉은 색으로 칠한다. 이 문을 들어서면 신성한 공간으로 나아간다는 것을 나타낸다.
재실(齋室)
재실은 왕릉의 수호관리를 담당하던 참봉(參奉)이 상주하던 곳으로 제사에 쓸 향을 보관하고 제기(祭器)를 간수하며 제사와 관련한 전반적인 준비를 하던 곳이다. 이곳에서 제례를 위한 의식을 준비했기 때문에 엄밀하게 말하면, 제례가 시작되는 공간이라고 볼 수도 있다. 재실의 가장 중심 건물은 향을 보관하는 향대청이며 그 옆에 제관이 머무는 재실이 있고 제수 장만 등을 주관하는 전사청, 제기를 보관하는 제기고 등이 있다. 각각의 건물은 별도의 행랑이나 울타리로 둘러싸여 공간적으로 구분되어 있다. 재실은 원칙적으로 봉분이나 정자각이 있는 능 중심부에서 2, 3백 미터 이상 떨어진 동남쪽에 놓인다. 제사가 있을 때 왕이나 제관은 일단 재실에 들어가 잠시 머물면서 옷을 갈아입고 제사에 나서게 된다. 건물의 구조는 팔작지붕에 민도리 양식을 취하고 있으며 단청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건물의 칸수는 능의 규모에 따라 달라진다.
정자각 구조도 이미지(향대청, 전시정, 재실, 명각)
조선왕릉 건축물
특징
조선왕릉의 건축물들은 당대 일반적인 건축물이 지닌 시대적 특징들을 반영하며 조선시대 건축기술의 또 다른 측면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들이다. 조선시대 건축은 삼국시대 이래 1천년에 가까운 오랜 기간 동안 축적하고 발전시킨 목조건축의 기술적 성장의 최종적인 단계의 산물이다. 여기에는 한반도의 자연조건을 충족시키면서 한민족이 일구어 온 예술적 감각이 농축되어 있다. 과장된 인공적 조작을 기피하고 자연이 만들어내는 미적 효과를 최대한 반영하고 이를 수용하여 자연에 조화를 이루는 것을 목표로 해서 만들어지는 조선시대 건축술을 왕릉의 건축에서도 유감없이 드러나 있다. 세부에 집착하지 않고 전체적인 조화와 비례를 중시하는 것은 조선시대 건축물이 갖는 전통이었다. 이러한 전통이 풍수전문가에 의해 선택된 왕릉에서도 잘 반영되어 주변 자연환경에 적절히 조화된 건축물을 만들어낸 것이다.
건축물의 조성과정과 기록
왕릉은 종묘나 궁전, 사직단과 함께 조선왕조가 심혈을 기울여 조성한 구축물의 하나이다. 특히 왕릉의 경우에는 왕이 승하하고 나서 5개월 안에는 반드시 그 조성이 완료되어 왕의 시신을 그곳에 안치해야 하는 시간적, 절대적 제약을 안고 조성되었다는 점이 특징이다. 왕이나 왕비 또는 왕세자, 왕대비가 승하하면 궁궐 안에 빈소를 차려놓고 그 시신을 5개월 동안 모셔두고 정성껏 제사를 모신다. 이 기간 동안에 왕릉의 터를 결정하고 나라에서 가장 뛰어난 장인들을 불러 모으고 가장 좋은 석재와 목재를 수집한다. 이어서 봉분을 꾸미고 봉분 주변의 석물을 조각해서 배치하고 정자각을 비롯해서 비각, 홍살문 재실 등을 지어내는 것이다. 그 공사과정은 한 치의 오차를 허용할 수 없는 신속하고도 정확한 작업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 보통 국상이 선포되면 당시의 좌의정(左議政)이 국상을 총괄하는 총호사(總護使)가 되었고, 판서(判書)들이 각 도감을 담당하게 된다.

가장 어려운 결정은 터를 잡는 일이다. 풍수지리사상은 터를 결정하는 중요한 지침이지만 그것이 항상 전문가들의 일치된 결론으로 모아지지는 않기 때문에 적지 않은 논란이 오고가게 마련이며 최종적인 결정은 오로지 왕의 손에 달려있다. 조선왕릉이 서울 외곽의 일정한 지역에 한정되지 않고 수원이나 여주 등 먼 거리까지 확장된 배경에는 이상적인 터를 잡기 위한 풍수전문가들의 부단한 노력과 이를 수용한 여러 왕들의 고심에 찬 결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석재는 상대적으로 구하기 수월했던 반면 목재의 경우가 약간의 어려움을 야기시켰으나, 그 수량이 많은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큰 곤란을 겪는 일은 없었다. 이는 조선시대에는 나라에서 필요로 하는 목재를 확보하기 위해서 몇 군데 왕실 소유의 산림을 확보하고 목재를 관리해 왔기 때문이다. 문제는 목재의 운반이었는데 이를 위해서는 목재운반을 용이하게 하기 위한 길을 내는 일이 더 큰 노력을 필요로 하였다.

최고로 숙달된 가장 뛰어난 기량을 갖춘 기술자들이 왕릉 조성에 동원되었다. 조선시대에는 나라의 중요한 공사에 투입되는 기술자들을 관리해 왔으며 이들은 궁궐이나 종묘를 비롯해서 왕릉조성과 같은 공사에 전문적으로 종사하였다. 종종 이름난 목수는 비슷한 시기에 궁궐의 건축공사와 왕릉의 공사는 물론 왕실의 사당 건축공사에 종사하여 자신의 기량을 발휘하였다. 궁궐의 목수로 알려진 이들의 이름은 각종 왕실 기록물에 남아있어서 후세에까지 그 명성을 남기고 있다. 한 가지 색다른 점은 단청 즉 건물 표면에 문양을 그리고 색을 칠하는 일만큼은 궁궐의 목수가 아니고 서울 근처 산속에 자리 잡은 불교사찰의 승려들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조선시대 승려들은 갖가지 기예에 능한 것으로 이름났었는데 이들 중에는 사찰 건물의 단청 전문가들이 적지 않았으며 이들 중 일부는 궁궐이나 왕릉 건축물의 단청 작업에까지 진출했던 것이다.
석물의 역사와 변화
왕릉에 석물을 세워놓는 제도는 통일신라시대에 형성되어 고려시대로 이어졌으며 14세기 말엽에 공민왕의 현릉(玄陵, 1374년)과 왕비 노국공주의 정릉(正陵, 1365년)에서 능침구조와 석물의 종류, 배치가 규범화되었다. 그리고 공민왕릉에서 형성된 석물의 배치와 구성의 규범은 조선왕조를 건립한 태조의 건원릉으로 계승되었다. 이러한 석물 배치는 제4대 세종대에 작성된 여러 규법집인 세종실록 「오례의」, 그리고 성종 5년에 간행된 『국조오례의』(1474년)에 따라 제작되었으며, 조선 왕릉 고유의 석물 구성 및 배치, 조형적 특징의 기본이 형성되었다. 임진왜란(1592년) 이후에는 장명등과 망주석에 꽃무늬가 조각되었고 동물형 세호가 나타나는 등 조선왕릉만의 독특한 형태가 등장하였다. 또한 영조대에 국조상례보편』(1758년)이 편찬되면서 능제 형태가 많이 줄어들어 병풍석을 완전히 폐지하고 석물의 크기도 작아지는 등 전체적으로 간소화되었다.
석물의 역사와 변화 테이블 - 구분, 제1기, 제2기, 제3기, 제4기로 구성
구분 제1기 제2기 제3기 제4기
기간
15세기 전반 - 15세기 중반
15세기 후반 - 16세기 후반
17세기 초반 - 18세기 초반
18세기 중반 - 20세기 초반
왕릉이름
건원릉(1408) - 창릉(1470)
선릉(1495) - 강릉(1567)
목릉(1630) - 의릉(1724)
원릉(1776) - 유릉(1926)
특기사항
조선건국 1392년
국조오례의 간행 1474년
(성종5년)
임진왜란1592년
(석공 피랍)
국조상례보편1758년
(영조34년)
주요특징
능원을 잔디 언덕 위에 배치하며 석마 등장
석물의 규모가 커지고 장엄함
기간에 비하여 능의 수가 가장 많고, 후반은 석물 규모가 작아짐
능원이 2단으로 바뀌고 다양한 양식이 혼재함
병풍석
면석에 12지신상 부조 장식, 후반에 병풍석 사라짐
병풍석 재도입, 우석에 영저영탁 대신 구름무늬 장식
난간석만 설치
면석에 모란문양, 우석에 연잎 장식
장명등
초반 4각형 / 후반 8각형, 사각화창
8각형, 4각화창
4각 석등 등장, 4각 화창
8각형, 원형화창4각형, 원형화창
석수
헌릉 석수 각4쌍, 그 외 석양 · 석호 각 2쌍
석양 · 석호 각 2쌍
석양 · 석호 각 2쌍
후반 황제릉에서는 석양과 석호는 사라지고 기린·코끼리·사자·해태·낙타가 등장
망주석
귀 모양에 간단한 장식과 구멍 있음
겹친 당초무늬의 화려한 장식에 구멍 있음
동물형 세호에 구멍 사라짐
동물형 조각이 정교해지고 구멍 없음
문무석인
초반 : 유연한 선과 둥근 환조 몸체로 고려 공민왕릉의 양식계승
후반 :크기가커지며 장엄미가 생기며 손이 노출됨
세부를 간략화 시킨 대담한 선과 단순화된 옷 주름 표현으로 괴량감이 강조되며 장엄한 조선능묘조각 형식 확립
옷 주름과 발을 벌린 자세가 정형화되었고, 무인석이 없는 왕비릉이 많으며 후반부터 키가 작아져서 장엄미가 사라짐
사실에 가까운 복식과 인체표현으로 다양한 양식이 공존하며, 금관조복형 문석인 등장하여 당시의 시대정신을 반영
조선왕릉 석물의 요소별 특성과 변화
조선왕릉의 석물은 주로 능침공간에 집중되어 나타난다. 이는 석물이 피장자를 위해 만들어진 요소들이라는 것을 알게 한다. 능침공간의 석물 구성은 아래와 같다.
봉분과 봉분주변
조선시대 왕릉의 둥근 봉분은 대개 보통 6m 정도의 높이이며, 호석의 역할을 하는 병풍석과 난간석으로 둘러져 있는 경우도 있고 병풍석이나 난간석이 없는 경우도 있다. 봉분의 형태가 원형인 것은 우리나라에서는 신라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며, 중국의 경우 명나라 때부터 황제릉이 원형분으로 되었다. 원형봉분의 주변에 12지신상을 호석으로 두른 구조는 한국 고유의 봉분 형태이다.
병풍석 (屛風石, 병석(屛石), 사대석(莎臺石))
여러 가지 석재로 이루어진 병풍석은 다른 나라와 왕릉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구조이다. 병풍석의 구조는 『세종실록』「오례」와 『국조오례의』의 기록을 보면 지대석(地臺石), 면석(面石), 우석(隅石), 만석(滿石), 인석(引石)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는 봉분의 흙이 흘러내는 것을 실질적으로 방지하는 기능을 하고, 상징적으로는 능을 수호하는 역할을 한다.
병풍석 이미지
병풍석 표현은 고려의 공민왕릉 병풍석의 형식을 계승하여 건원릉(健元陵, 태조)과 헌릉(獻陵, 태종)의 병풍석 면석에는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과 구름무늬를 새기고, 면석 옆의 우석은 불교의 영저(靈杵, 금강저)와 영탁(靈鐸, 방울)을 새겼다. 영저와 영탁은 불교에서 수호적 성경을 지닌 불구(佛具)이며 십이지신과 마찬가지로 능을 정신적으로 수호하는 상징적인 도상이다. 이후 『국조오례의』의 편찬으로 우석의 영저와 영탁 무늬는 구름무늬로 바뀌었다. 그러다가 장릉(長陵, 인조)을 시작으로 면석의 십이지신상이 없어지고 모란무늬로 바뀌었다. 이는 장릉이 뱀의 피해가 있어 능을 옮겼기 때문에 원래 능에 있던 십이지신상의 뱀상 조각을 피하기 위한 방편이었다는 설이 있다. 모란은 화려하면서도 전통적으로 부귀영화를 상징하는 꽃이기 때문에 병풍석의 장식으로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이후 모란은 융릉(隆陵), 홍릉(洪陵), 유릉(裕陵) 병풍석에서 나타난다. 또한 우석도 기존의 구름무늬에서 연꽃과 난초 무늬로 바뀌었다. 따라서 불교의 요소가 왕릉 석물에 직접적으로 나타난 것은 조선 초기에 해당되며, 시대가 바뀔수록 점차 조선만의 형식으로 바뀌게 된다.
만석 이미지
만석은 면석과 우석을 위에 있는 것으로 태릉(泰陵, 문정왕후)을 시작으로 십이지신상의 표현이 글씨로 바뀌어 만석이 새기기도 하였다.
인석 이미지
인석은 만석과 봉분안에 두른 삼물(석회, 가는 모래, 황토)을 받쳐주는 역할을 하는데, 기다란 사각기둥의 형태로 12개가 놓여 있다. 인석 끝에는 국화, 규화(접시꽃), 모란 등의 꽃무늬를 새겼다. 이후 융릉(隆陵, 장조)을 시작으로 꽃봉우리 모양으로 나타나며 대한제국의 홍릉(洪陵, 고종)과 유릉(裕陵, 순종)에서까지 적용되었다.
면석과 우석의 장식에 따라 병풍석의 내용을 3가지 양식으로 나눌 수 있다.
병풍석 양식 분류 테이블 - 구분, 시기, 명석장식, 우석장식 으로 구성
구분 시기 면석장식 우석장식
초기 태조 건원릉 ~ 태종 헌릉 십이지신상+운채+서기+하단에 당초문 영저와 영탁
중기 문종 현릉 ~ 선조 목릉 십이지신상+운채 구름 문양
후기 인조 장릉 ~ 순종 유릉 모란꽃 연꽃 혹은 연잎+난초
난간석(欄干石)
난간석 이미지
난간석은 병풍석 밖으로 봉분을 울타리처럼 두르거나 병풍석 없이 봉분을 두르고 있는 석물로, 왕릉의 봉분 주변에 난간석을 조성한 것은 우리나라 능제의 특징이다. 이미 통일신라의 성덕왕릉(736년)에서 그 초기 예를 찾아볼 수 있으며, 이는 중국의 능에서는 보이지 않는 석물로, 건축물에 난간을 돌로 만들었던 방식을 왕릉석물에 도입한 것으로 보인다. 세조 광릉 이후 병풍석이 조성되지 않은 경우가 많지만, 병풍석의 유무와 상관 없이 거의 모든 왕릉에는 난간석이 조성되어 물리적으로나 시각적으로 봉분을 보호하는 기능을 하고 있다.
혼유석(魂遊石, 석상(石牀))과 고석(鼓石)
혼유석과 고석 이미지
능의 정면에 상의 형태로 놓인 혼유석의 원래 명칭은 석상(石床, 石牀)이다. 재궁(관)을 넣은 후 그 통로를 막고 그 위에 박석과 북 모양의 둥근 고석을 놓고, 그 위에 혼유석을 설치한다. 혼유석이라는 명칭은 임진왜란 이후부터 속칭(俗稱)으로 사용되기 시작했으며, 혼이 앉아서 쉬는 의미로 해석된다. 혼유석의 기원은 신라에서 찾을 수 있는데, 태종무열왕릉의 봉분 앞에 공양물을 얹을 수 있는 석상의 잔재가 있으며, 그 외의 통일신라 왕릉에는 대부분 석상이 남아 있다. 이러한 석물은 중국의 능에서 보이지 않는 우리나라의 독자적인 창안의 석상으로 후에 혼유석의 개념으로 바뀐 것으로 짐작된다.

혼유석을 받치고 있는 둥근 북 모양의 고석은 ‘족석(足石)’, '부석(跗石)'으로 불리기도 한다. 건원릉(태조)과 헌릉(태종과 원경왕후)은 5개를 배치하였고, 영릉(세종과 소헌왕후)부터 4개를 배치하였다. 그러다가 휘릉(徽陵, 장렬왕후)에서 5개를 배치하였는데 이는 건원릉의 예를 잠시 따랐고, 그 이후에는 다시 4개를 설치하였다. 고석의 높이는 평균적으로 50cm정도인데 둥근 형태의 사면에는 귀면(鬼面) 모양이 새겨져 있다. 『국조오례의』에는 나어두(羅魚頭)를 새긴다고 명시하고 있는데, 이는 어두귀면(魚頭鬼面), 즉“물고기 머리에 귀신 얼굴”이라는 사전적 의미로, 흉측하게 생긴 얼굴을 조각하여 사악한 잡귀를 물리치는 역할을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귀면은 입에 고리를 물고 있어 무서운 표정이 아니라 웃고 있는 인상을 준다.
석호(石虎)와 석양(石羊)
석호와 석양 이미지
봉분 주변에는 동물 조각이 둘러져 있는데, 정면을 제외한 삼면에 석호와 석양이 2쌍씩 좌우로 배치되어 있다. 우리나라의 능에 동물상을 배치하는 관습은 통일신라시대 경주의 성덕왕릉(736년경)의 네 귀퉁이에 사자를 배치한 것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고려시대에는 석사자 대신에 석호가 나타났으며 개성의 7릉군 3릉에서 석양이 함께 등장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공민왕릉의 석수 배치는 태종의 헌릉의 석호, 석양 배열의 원형이 되었다. 능의 주변에 석호와 석양을 배열하는 관습은 이미 중국에 있었으며 후한시대에 석인, 석주와 함께 양, 호랑이, 낙타, 말을 능 앞에 배치했다.

그러나 조선시대의 왕릉 동물상의 위치로 보아, 조선 왕릉의 석호와 석양은 능의 뒤편 봉분 주변에 놓여 있지만, 중국의 동물상들은 능의 입구, 즉 신도 양옆에 인물상과 함께 도열되어 있어, 그 역할이 다른 것을 알 수 있다. 중국의 경우는 실제 궁전이나 관아의 문 앞에 경비를 세웠던 모양을 모방한 형상이고, 석수가 놓인 방향에서도 중국릉의 석수는 신도를 향하여 일렬도 도열하는 형식인데, ‘분총(墳塚)을 표식(表飾)하여 생전의 의위(儀衛)와 같게 하려는 까닭’으로 권력의 과시나 길상의 목적이 강하다.

이에 비해, 조선의 석수들은 봉분 주변에서 능이 아닌 외부를 향해 있다. 즉 곡장에 머리를 대고 있고 봉분 쪽에 엉덩이만 보이도록 배치한 것은 능침에 대한 외부의 침입에 대한 경계에 전념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권력의 과시보다는 능을 수호하고 음양의 기운의 균형을 잡기 위한 상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다. 석수의 자세에서 석양은 항상 서있는 자세로서 수호의 느낌이 강조되었고, 반면 석호는 두 앞발을 세우고 앉아서도 충분한 경계를 할 수 있는 것으로 보이며, 석양과 조화 있는 조형감과 심리적인 균형감을 유지하고 있어 능역의 분위기에 안정감을 준다.

석양과 석호를 번갈아 배치한 것은, 양은 온순함을, 호랑이는 사나움을 강조하며, 또한 음양의 조화를 의미하기도 한다. 한편, 양은 희생의 동물로 제물로도 사용되지만 신양(神羊)의 성격을 띠어 성(城)수호의 의미를 띤 것으로 해석되기 때문에 상징적으로 사악한 악귀를 막는 성격(벽사)을 지닌 동물상으로 볼 수도 있다. 호랑이는 산천임택(山川林澤)에서 맹수의 해를 막는 성격을 지니고 있어, 역시 능을 수호하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렇듯 조선 왕릉의 석물은 중국처럼 권위의 상징이기 보다는 벽사의 의미가 강조된 상징성을 갖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공격적인 모습이 아니라 편안히 앉아 있고, 얼굴 역시 무서운 표정이 아니라 친근하고 온순한 표정을 하고 있다.
망주석(望柱石)과 세호(細虎)
망주석과 세호 이미지
혼유석(석상) 좌우에 촛대처럼 서 있는 한 쌍의 망주석은 석망주, 망두석(望頭石), 촛대석, 화표석(華表石), 전죽석(錢竹石)등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망주석의 기원은 중국에서 시작된 것으로 중국에서는 묘역이나 신도의 입구를 표시하거나 석물의 시작점을 알리는 표식으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조선왕릉에서 망주석의 기능은 중국과는 다르게, 혼이 자기의 유택을 찾을 때 이용한다고 하고, 다산을 위해 상징한다고도 알려져 있다. 그러나 명칭으로 볼 때, 바라볼 망(望), 기둥 주(柱)가 의미하듯이 묘가 있다는 곳을 멀리서 바라보아 쉽게 알아볼 수 있도록 알려주는 것으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망주석 가운데에는 상징적인 무늬를 새기는데, 『국조오례의』에는 ‘귀를 만들어 구멍을 판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국조상례보편』에는 ‘세호를 새긴다《왼쪽 기둥에는 올라가는 모양을, 오른쪽 기둥에는 내려오는 모양을 새긴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세호는 중국의 망주석에서는 볼 수 없는 것으로, 세호의 한자의 뜻풀이대로 하면 아주 작은 호랑이라는 뜻이나, 실제는 호랑이 모습과 닮지는 않았다. 세호의 역할과 새긴 목적이 기록에 없어 상징성을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시대가 내려오면서 장식화되었고 조선 중기부터는 구멍이 막혀 있으며 꼬리가 긴 동물이 조각되었다. 대체로 좌승우강(左陞右降)의 형태로 조각되나 일부 왕릉은 반대로 조각되는 경우도 있다.

망주석 가운데에는 상징적인 무늬를 새기는데, 『국조오례의』에는 ‘귀를 만들어 구멍을 판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국조상례보편』에는 ‘세호를 새긴다《왼쪽 기둥에는 올라가는 모양을, 오른쪽 기둥에는 내려오는 모양을 새긴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세호는 중국의 망주석에서는 볼 수 없는 것으로, 세호의 한자의 뜻풀이대로 하면 아주 작은 호랑이라는 뜻이나, 실제는 호랑이 모습과 닮지는 않았다. 세호의 역할과 새긴 목적이 기록에 없어 상징성을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시대가 내려오면서 장식화되었고 조선 중기부터는 구멍이 막혀 있으며 꼬리가 긴 동물이 조각되었다. 대체로 좌승우강(左陞右降)의 형태로 조각되나 일부 왕릉은 반대로 조각되는 경우도 있다.
장명등(長明燈)
장명등 이미지
장명등은 중계의 가운데에서 약간 북쪽으로 치우쳐 놓여 있다. 장명등은 등불을 밝히기 위한 석등으로 조선 왕릉에서만 등장하는 석물이다. 『국조오례의 · 흉례(凶禮)』의 장명등에 관한 기록을 보면 ‘4방의 옆을 통해 파서 연기(烟氣)를 흩어지게 한다’ 라고 그 구조를 설명하고 있어, 초기에는 실제로 묘역을 밝히는 기능을 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장명등에서는 불을 피운 흔적이 없어 상징적인 조형물이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구조상으로 보면 일반적인 석등보다 옥개석이 더 길쭉하며 대석(臺石)이 굵어서 부도의 형식을 띠고 있다. 옥개석 위에는 중앙에 보주를 얹어서 전체적으로 장중한 느낌을 준다. 장명등은 초기에는 고려시대 왕릉과 같이 화사석의 평면이 사각형이었으나 이후에 팔각형, 사각형, 팔각형의 형태로 반복 변화된다.
장명등 형식별 분류 테이블 - 구분, 제1형식, 제2형식, 제3형식, 제4형식, 제5형식, 제6형식, 제7형식으로 구분
구분 제1형식 제2형식 제3형식 제4형식 제5형식 제6형식 제7형식
사진 정릉 장명등 이미지 건원릉 장명등 이미지 광릉 장명등 이미지 영릉 장명등 이미지 명릉 장명등 이미지 융릉 장명등 이미지 홍릉 장명등 이미지
능명 정릉(貞陵) 건원릉(健元陵) 광릉(光陵) 영릉(英陵) 명릉(明陵) 융릉(隆陵) 홍릉(洪陵)
면수 4 8 8 8 4 8 4
화창
모양
□ + 8각 8각 8각
특징 고려 석등형 불교 석등형 부도형태 가미,
하단 짧음
전형적인
장명등 형태,
하 운족형
건축형 지붕에
목각 테이블 다리
다리에 안상형 가늘고 긴 형태
문석인(文石人)
문석인 이미지
머리에 쓰는 복두(幞頭), 포(袍)로 불리는 옷, 허리띠인 대(帶), 손에 드는 홀(笏), 가죽신인 화(靴)를 갖춘 공복을 착용한 백관의 모습이다. 조선왕릉 문석인의 자세는 기본적으로 같지만 키, 얼굴의 크기와 표정, 선의 부드러운 정도, 옷 주름의 표현, 모서리의 곡선화 정도 모자의 형태 등에서 변화가 나타난다.
문석인 구분 테이블 - 구분, 1기, 2기, 3기, 4기로 구성
구분 1기 2기 3기 4기
크기 250cm 내외 300cm 내외 180cm 내외(후반) 250cm 내외
1기 문석인 이미지 2기 문석인 이미지 3기 문석인 이미지 4기 문석인 이미지
신체비례 4.7등신(건원릉) 3.3등신(태릉) 3-4등신(의릉) 5.3등신(융릉)
신체형태
초반 : 유연한 선과 둥근 환조 몸체로 고려 공민왕릉의 양식을 계승
후반 :크기가커지며 장엄미가 생기며 손이 노출됨
세부를 간략화 시킨 대담한 선과 단순화된 옷 주름표현으로 괴량감이 강조된 주먹코로 전형적인 조선 석의 양식
옷 주름과 발을 벌린 자세가 정형화되었고, 무인석이 없는 왕비릉이 많으며 후반부터 키가 작아져서장엄미가 부족함
사실에 가까운 복식과 인체표현으로 다양한 양식이 공존하며, 금관조복형문석인 등장하고, 이는 당시의 시대정신 반영임
얼굴 장년의 얼굴 세부 표현 사각형의 얼굴과 주먹코로 중년의 모습이며, 목을 어깨에 파묻음 약간의 미소가 있음 미소가 뚜렷이 나타나며 사실성이 반영된 세부 표현
사각복두 사각복두 사각복두 사각복두/금관
분위기 온화하면서 장엄 단순하고 장엄 규모가 작아지면서
장엄미는 사라짐
장엄미보다는
사실성이 보임
무석인(武石人)
무석인 이미지
능침의 하계에는 무석인 한 쌍이 석마를 대동한 채 서있다. 무관의 성격을 강하게 표현하기 위하여 문석인에 비해 다소 커진 얼굴과 바튼 목, 얼마간 굵어진 듯한 몸 처리와 약간 길어진 상반신의 처리 그리고 중요한 골격마디의 강조 등으로 무관의 특징을 표현하였다. 갑옷을 입고 투구를 쓰고 칼을 잡고 서 있는 무석인의 형식은 전 시기에 걸쳐서 같은 세부요소들이 교차로 나타나므로 문석인에 비하여 시기별로 뚜렷한 구분을 하기가 힘드나, 크게 보면 문석인에서 보이는 변화와 비슷하게 변한다.
무석인 구분 테이블 - 구분, 1기, 2기, 3기, 4기로 구성
구분 1기 2기 3기 4기
특징
사실적인 조각, 부드러운 문석인에 비해 우람한 형태로 입체감이나 괴체감이 살아있음. 몸체 모서리의 자연스러운 표현
모서리각 각이 지도록 조각, 하체보다 상체가 비대해 짐. 목이 없어지고 커진 얼굴에 짧은 상반신으로 기괴함과 장중함이나타남. 손과 팔꿈치가 수평을 이루고 있음. 귀가 밖으로 노출
크기가 작아지고 정형화된 형상이 나타나기 시작. 투구의 목가리개가 위로 올린 형태가 등장. 운형(雲形)의 투구창
문무석인의 위계가 없어짐(단 소멸), 의복형태가 변화, 작아진 얼굴과 개성 있는 표정이 나타남. 몸의 굵기가 축소. 사실적인 옷 주름 표현, 무석인 투구의 깃털 장식이 삼지창으로 변화, 배갑에 동물상이 등장
석마(石馬)
석마 이미지
능침의 하계에는 무석인 한 쌍이 석마를 대동한 채 서있다. 무관의 성격을 강하게 표현하기 위하여 문석인에 비해 다소 커진 얼굴과 바튼 목, 얼마간 굵어진 듯한 몸 처리와 약간 길어진 상반신의 처리 그리고 중요한 골격마디의 강조 등으로 무관의 특징을 표현하였다. 갑옷을 입고 투구를 쓰고 칼을 잡고 서 있는 무석인의 형식은 전 시기에 걸쳐서 같은 세부요소들이 교차로 나타나므로 문석인에 비하여 시기별로 뚜렷한 구분을 하기가 힘드나, 크게 보면 문석인에서 보이는 변화와 비슷하게 변한다.
황제릉의 석물
황제릉의 석물 이미지
1897년 대한제국이 선포된 이후 고종의 홍릉과 순종의 유릉은 대한제국 황제릉의 제도로 바뀌게 된다. 남양주 홍릉과 유릉의 석물은 능침 주변과 침전 앞 석물로 나눌 수 있다. 능침 주변에는 봉분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되는 병풍석, 난간석, 혼유석, 망주석, 장명등을 배치하여 조선왕릉의 전통을 계승하였다. 그러나 기존 능침에 있던 문·무석인과 석양·석호·석마 등 능침을 수호하는 상징적 기능을 했던 석물들은 침전 앞으로 배치하였다. 또 전통적인 석호와 석양 대신 기린(麒麟), 코끼리[象], 사자(獅子), 해태[獬豸], 낙타(駱駝), 말[馬] 같은 석수들로 새롭게 구성하여 조선왕릉과 차별을 두었다. 그리고 전통적으로 능침공간에 배열된 조선왕릉의 석물이 왕을 호위하는 상징성이 강하게 나타내었다면, 홍릉과 유릉에는 일반인들이 접근할 수 있는 침전 앞에 석물을 놓아 황제로서의 위용을 드러내고자 하였다. 이는 대한제국 선포 후 고종이 직접 왕릉제도를 황제릉제도로 개혁한 것으로 중국 명나라 황제의 제도를 참고하여 기존의 조선왕릉 제도를 계승한 형태이다.
1926년에 조성된 순종의 유릉은 기본적으로는 홍릉의 형식을 그대로 따랐지만 조각기법에서 사실적인 인체비례로 변화했고 조각 자체도 입체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이는 조선 전통 조각기법과는 전혀 다른 서양식 조각수법에 의해 제작되었기 때문인데, 외국 조각가들이 석물 조성에 참여한 데서 기인한 것으로, 제작시기가 일제강점기라는 시기를 반영한 시대적 산물이다.
석물의 제작과 기록
재료적 특성
조선 왕릉 석물은 화강석으로 제작되어 있다. 화강석은 입자가 곱고 철분이 없는 밝은 색상을 띠고 있어 세부 조각표현이 잘 드러난다. 특히 석질도 부드러워 깎기 좋은 강화도 화강석을 최고의 품질로 여겼다. 그러나 운반의 어려움 때문에 일부 능에서만 사용할 수 있었고, 대다수의 능은 서울 근교와 수원 등의 화강석을 사용하였다.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 매우 단단하고 석질이 좋은 화강석으로 제작되어 거의 영구적으로 보존 될 수 있는 내구성을 가지고 있다. 이는 작품의 분위기에 작용하여 정교한 세부는 보이지 않지만 투박하고 온후한 느낌의 질감을 나타낸다.
제작
조선시대 왕이나 왕비가 사망하면 능역을 조성하기 위해 만들어지는 산릉도감(山陵都監)에는 석물을 제작하는 부속기관이 별도로 마련되어 있다. 여기에는 주요 석물 제작팀(大浮石所), 건축물에 사용되는 석물을 제작하는 팀(小浮石所), 석물 운반팀(輸石所) 등을 구성하여 석재의 채취에서 가공과 운반 및 설치에 이르기까지 분업화하여 석물을 조성했다. 그리고 석물의 공정을 지휘하는 패장(牌將), 편수(邊手), 조각을 하는 석수(石手), 그리고 석물을 설계하는 화사(畵師) 등이 서로 협력하여 석물을 완성하였다.
제작기록
왕릉 조성의 전 과정을 기록한 『산릉도감의궤』등 다양한 기록물이 존재하고 있어서 당시의 특정 왕릉 조성의 배경과 역사와 더불어 석물 양식 변화의 이유까지도 알려 주고, 특히 석물 제작자의 이름은 물론 조성비용과 날짜에 구분이 가능하여 일목요연한 역사적 분석을 가능하게 해 준다. 또한 『산릉도감의궤』를 통하여 각 석물의 종류나 크기 및 모양을 알 수 있는데, 여기에는 능역에 포함되는 모든 석물의 모양을 그리고 그 옆에 간략한 내용 설명과 함께 치수를 적시하고 있다.
조선왕릉의 경관
공간의 위계질서를 고려한 경관 처리
조선왕릉의 주변경관은 산세로 겹겹이 둘러싸여 능역의 중층성(重層性)을 가지고 있으며 강한 폐쇄성과 안정성을 확보한 위요 공간 속에 외부와 분리된 경관적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능역의 경우에는 계층적 성격을 분명하게 인식시키게 하기 위해 독특한 공간 처리가 되어 있다.
봉분이 있는 능침공간과 제사를 지내는 제향공간 사이에는 많은 지면 차이가 있는데, 이는 능침공간과 제향공간을 위계를 보이기 위함이다. 특히 조선왕릉에서는 능역의 가장 상위 공간인 능침공간의 폐쇄감을 높이기 위한 공간처리가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능침공간의 성역성과 신비감, 그리고 권위성, 엄숙성을 확보하기 위하여 제향공간에 있는 여러 구성요소들을 활용하여 시선의 차폐를 유도한 것이다. 일반적으로 직선축의 능원인 경우에는 정자각으로 차폐효과를 나타낸다. 이렇게 하면 참배객은 홍살문에서 정자각으로 가는 동안에도 정자각의 높이와 볼륨 때문에 능의 봉분이 시계에 들어오지 않게 된다.
조선왕릉 경관 이미지 - 주산 > 봉분 > 정자각 > 참배자 > 조산
그러나 왕릉의 주인인 능주의 입장에서 보면 왕릉이 폐쇄된 공간만은 아니다. 죽은 자가 안치되어 있는 봉분에서 보면 왕릉은 분명 참배자의 활동 너머로 더 넓고 높게 트인 공간이며, 시각적으로 개방된 공간을 형성한다. 참배자에게는 폐쇄된 이미지로 엄격하게 공간의 위계가 구분되지만 능의 주인에게는 열린 이미지로 조성되어 있는 것이 조선왕릉의 경관적 특징이라 할 수 있다.
그 밖에 조선왕릉에는 인위적으로 지당(池塘)을 조성한 경우가 있는데, 이는 풍수지리적으로 능원 진입공간의 좌우 맞닿은 곳이 넓어 허한 경우 비보 차원에서 만들어 놓은 것이다. 형태는 조선의 전통연못 형태인 방지원도(方池圓島)가 대부분이며 풍수적 경관적 특성에 따라 원지 또는 원지원도(圓池圓島)의 형태로 나타나기도 한다. 기능적으로는 능역의 중층성을 위한 경관적 위요성과 능역 경작용 저수와 능역 내 수계관리를 위한 실용성을 들 수 있다. 때로는 능 참배 시 휴식기능과 경관의 투영 등 경관적 가치와 심신수양의 장의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훌륭한 식재 보존·관리
식재의 보존/관리 이미지
왕릉의 능역은 능침공간 등의 핵심공간과 마찬가지로 모두 죽은 자를 배려하여 관리되었다. 능역의 대부분은 자연산림공간으로 능침공간을 중심으로 겹겹이 에워싸 완충의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러므로 왕릉의 환경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식재에 관련한 부분이다. 특히 소나무와 전나무 그리고 잣나무 등을 능역에 많이 심었다. 능침공간과 제향공간에는 잔디를 깔아 사초지를 만들었다. 그리고 동선을 따라 진달래 등의 화훼류를 식재하고 연지(蓮池) 주변에는 버드나무를 식재하였다. 특히 능의 좌우 및 후면에는 소나무를 심고 전면의 낮은 지대에는 오리나무를 식재하도록 하는 것은 능침공간의 전형적인 식재방식이었다.

특히 오리나무의 경우에는 습지에 강한 성질을 가지고 있는 수종으로 지대가 낮은 왕릉의 전면에 식재함으로써 물로 인한 피해를 막고자 하였다. 왕릉 안에 있는 지당(池塘) 주변으로도 식재계획이 있었다 .『강릉지(康陵誌)』 「지당수개조(池塘修改條)」를 보면, “능 앞에는 반드시 못이 있으며, 막힌 곳은 개수(改修)를 하도록 한다... 못 가운데에는 조그만 섬이 있는데, 섬에는 몇 종의 꽃과 전나무가 있으며 연못의 주변에는 많은 수의 나무와 꽃들을 심도록 한다”고 되어 있다. 그리고 못 안에는 연꽃도 심어져 있었다. 또 『광릉지(光陵志)』에 따르면 “금천교를 지나 길을 따라 좌우에 진달래를 수백 그루 재식하고 재실 북쪽 창문에까지 수백 그루 피어 있으며, 또 마을 서쪽 어귀(西洞口) 4km의 길에는 많은 전나무와 잣나무가 있으며 마을 동쪽 어귀(東洞口) 2km 정도의 길을 따라서는 전나무와 잣나무, 더불어 진달래를 서로 맞대어 심었다“고 하여 재식은 왕릉의 영역 외부에서부터 이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역대 왕들은 왕릉의 재식에 대하여 특별히 신경을 썼다. 1408년 3대 태종은 아버지 태조의 건원릉에서 제례를 지내고 능침 주변을 둘러본 뒤 잡풀을 제거하고 소나무와 잣나무를 두루 심어라 명하기도 하였다. 또 정조가 어느 여름날 아버지의 능인 융릉을 참배하러 갔다가 주변의 소나무에 송충이가 너무 많아 나무들이 병들어 가고 있음을 보고 슬퍼하며 송충이 한 마리를 잡아 이빨로 깨물어 죽였는데, 그 후에 이 일대의 송충이들이 감쪽같이 사라졌다고 하는 일화는 매우 유명하다. 왕릉은 풍수지리에 근거한 자연경관에 입지하고 있어 특별한 관리나 계획이 필요치 않을 것 같아 보이지만 능역의 산림은 이와 같이 인공적으로 조성되었다. 더불어 철저히 관리되기도 하였다.

여러 가지 이유로 능역에 수목이 줄어들었을 경우에는 봄, 가을로 보식 또는 식목을 하였으며, 정기적으로 잔디를 파종하고 제초작업을 하였다. 또 ‘화소(火巢)’ 와 ‘해자(垓字)’를 설치하고 관리하여 산림을 화재 피해 에서 막고자 하였으며 능참봉(陵參奉)을 상주시킴은 물론, 많은 수의 관리자를 두어 능침공간을 중심으로 능역을 관리하였다.

그리고 능역의 재식관리는 각 능마다 양묘장을 별도로 설치해 둠으로써 양질의 수목을 공급하도록 하였는데, 이 관리방법은 지금까지도 이어져오고 있다.
이처럼 왕릉 일대는 자연환경을 잘 관리한 덕분에 다양한 종류의 수종이 보존되고 있어 좋은 경관을 형성하고 있으며 생태계 보존상태 또한 매우 우수하다. 특히 도시화가 고도로 진행되고 있는 현대 도시 지역에서 왕릉은 생태적 안정성과 종 다양성을 보장하는 주요한 생태계로서 그 중요성이 부각되고 있다.
비교분석
세계 대부분의 민족은 왕릉을 자신들의 문화유산으로 소중히 보존해 오고 있으며 그 중에는 피라미드, 중국의 명청릉, 베트남 Hue Monuments 등과 같이 이미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사례도 적지 않다. 다만 각 지역의 왕릉들은 각각의 왕릉이 지어진 시대적 조건 또는 문화적 여건에 따라 서로 다른 배경을 지니고 있다. 이집트의 피라미드나 중국의 진시황릉처럼 고대 사회의 산물로 조성된 것이 있는가 하면, 이슬람문화권의 무덤처럼 종교적인 배경에서 만들어진 것이 있으며, 그 밖에도 각 민족이 갖고 있는 고유한 문화배경에서 형성된 것이 있다. 이집트의 피라미드는 왕 자신이 신격화되어 거대한 무덤을 조성한 사례가 될 것이며 부하라에 있는 이스마일무덤(Tomb of Ismail)이나 술탄 산자르의 능묘(Mausoleum of Sultan Sanjar)는 이슬람 문화가 만들어 낸 독특한 사례이다. 유럽의 기독교 문화권에서 무덤은 지역의 교회당과 불가분의 존재이며 힌두 문화권에서는 별도로 무덤을 만드는 대신에 윤회사상에 바탕을 두어 시신을 화장하는 전통을 지니고 있으며, 불교 문화권은 기본적으로 힌두교와 유사한 전통을 갖고 있다.

이 가운데 동아시아, 즉 중국이나 한국, 일본, 베트남의 왕릉은 유교사상에 입각하여 이루어진 서로 공통되는 보편적 가치가 있다. 유교는 종교적 교리를 가지고 있거나 특정한 신앙의 대상을 강조하지는 않지만 독특한 내세관을 가지고 있다. 유교에서는 사람이 죽더라도 그 자손이 존재함으로써 자신의 존재가 계승되고 이어진다는 개념을 가지고 있으며, 자신의 존재는 먼 조상으로부터 이어온 것이고 또 자손에 의해 먼 미래에까지 이어진다는 신념을 바탕에 두고 있다. 그 때문에 자신이 존재할 수 있는 근원인 조상은 절대적인 존경의 대상이 되며 조상에 대한 기억과 존경은 각별한 의미를 지니는 것으로 받아들인다. 이 때 조상의 존재를 가장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것이 조상의 무덤이다. 이런 이유로 유교 문화권에서 조상의 무덤은 다른 어떤 것에 못지않은 중요한 의미를 지니게 된다. 특히 왕에 의해 통치되어 오던 전통사회에서 무덤 가운데도 가장 으뜸으로 여기는 것은 왕릉이다. 이런 의미에서 동아시아 유교문화권에서 왕릉은 공통되는 보편적 가치와 함께 다른 문화권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독특한 의미와 가치를 지니고 있다.
중국 명·청릉과의 비교
한국의 조선시대는 중국의 명·청대에 해당된다. 중국의 명 13릉과 청동릉, 청서릉을 조선왕릉과 비교하여 보면 몇 가지의 차이점이 드러난다.

첫째, 한국과 중국의 능침은 기본적으로 당시의 세계관을 지배하였던 유교 예제에 따라 남향을 선호하였으나, 한국적인 풍수의 영향을 크게 받은 조선왕릉은 반드시 능침을 남향하도록 하는 것에 국한하지 않았다. 특히, 조선시대의 왕릉은 배산임수한 지형의 산기슭에 능원을 구축하여 좌우로 산세가 위요하도록 하였지만, 능침 뒤의 조산과 능침 앞의 안산을 봉분 및 시설물과 일직선 축을 이루도록 배치하지 않고 자연 지세에 맞추어 배치하였다는 점에서 중국과 구분된다.

둘째, 시신을 모시는 공간을 조성하는 방식에 있어서 중국은 지하에 궁전을 연상하게 하는 큰 내부공간을 만들고 거기에 관을 안치한데 비해, 조선왕릉은 중국과 같은 지하궁전을 조성하지 않고 기본적으로 관을 안치할 공간만 조성한 점에서 중국과 구분된다. 이렇기 때문에 조선왕릉은 도굴되지 않고 원형이 잘 보존될 수 있었다.

셋째, 능의 구성과 주변 환경 처리방식의 관점에서 볼 때 조선왕릉은 봉분을 조성하는 것만이 기존지형을 약간 변화시킬 뿐이며 그 이외에는 기존의 자연환경을 훼손하지 않고 그대로 보존하는 것으로 능역구성을 마친다. 중국 능의 봉분은 높이가 수십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규모로 조성된데 비해, 조선왕릉은 봉분의 높이가 불과 3∼5미터에 불과해 자연친화적으로 조영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조선 왕릉 능침의 크기의 관점에서 중국과 비교해 볼 때 건조물과 자연환경 사이의 관계를 인식하는 양국 간 자연관의 차이를 잘 보여준다.

넷째, 조선왕릉의 중심은 어디까지나 봉분이며 그러한 봉분의 중심성은 능역 전체의 배치계획과 시각적 경험에서 분명히 확인된다. 중국 청대 황릉의 경우 봉분이 어디에 있는지 밖에서 조망이 잘 안 되는 경우가 많고 봉분 주위를 벽돌로 쌓아올린 경우도 있다. 이런 점에서, 조선왕릉은 능침을 신성시하고 보호하는 상징적 의미를 중국과 달리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조선왕릉의 봉분 중심적 태도는 한반도의 삼국시대부터 현재까지 이어져 내려오는 것으로써 봉분형식 자체가 한국 고유의 전통적 가치관임을 엿볼 수 있다.

다섯째, 조선왕릉에서의 건축물은 능역의 시작을 알리는 상징물, 제사를 드리기 위한 장소제공, 제사준비와 관리에 필요한 공간 설비, 신도비를 보호하기 위한 비각 정도의 최소한의 건조물에 국한된다. 그 건조물들은 기능적 필요에 따른 것이며 건축물 자체를 크게 해서 강조하려는 의도는 최소화 시킨 것이다. 배치 또한 중국과 같이 엄격한 좌우대칭을 따르지 않는다. 규모, 장식 등의 측면에서도 중국보다 매우 간소하고 소박하며 과도한 치장을 절제하였다.

여섯째, 중국의 석물과 조선왕릉의 석물을 비교해보면, 기본적인 형태와 목적은 유사하지만 석물이 설치된 주변 환경, 작품의 크기, 재료, 인상, 세부 표현 등에서 차이가 나타난다. 중국은 거대한 크기와 사실적인 조각으로 위압감을 주는데 반해, 조선왕릉의 석물은 잔디 언덕에 독립해서 높게 설치하고 단순화된 화강석 조각 형태 및 색상으로 인해 은은하며 엄숙한 수호신상적 목적이 잘 구현되어 있다. 특히 석인상의 경우 중국과 비교해 볼 때 몸에 비해 큰 머리의 비례를 갖고 있으며 전체적으로 사각 기둥의 느낌이 나도록 형태를 단순화시켰다. 이는 의례용 석물이라는 측면에서 독자성과 예술성이 두드러진다고 볼 수 있다.

일곱째, 조선왕릉의 공간구성은 뒤의 봉분과 그 앞의 평평한 외부공간으로 구성되며, 자연환경이 만드는 장소에 대한 느낌(Sense of place) 자체가 중요한 왕릉의 가치가 될 수 있다. 중국 명청 시대 능침의 장소감은 조선왕릉과 사뭇 다르다. 중국 능은 건물로 둘러싸여진 인공적 중정들이 주류를 이루어 능침이 자연의 주인이 되도록 느끼게 한다. 이것은 조선왕릉과는 완연하게 다른 것으로써, 능 조성이 결과적으로 무엇을 추구하였는가에 대한 확연한 차이를 드러낸다. 많은 경우 조선왕릉의 장소적 느낌은 자연지형에 의해 형성된 외부공간이지만 밝고 평온하며 안정적이고 시각적으로 균형 잡혀 있다. 그리고 그 느낌은 인공적 건조물에 의해 조성된 것이 아니고 기본적으로 자연환경 자체가 갖고 있는 자리에서 오게 된다.

여덟째, 능침제도가 살아 있는 사람들로 하여금 능묘에 참배하고 제사지내게 하기 위한 목적을 지녔다고 한다면, 중국 명·청 시기의 능침은 현재 그 기능이 사라진 반면, 조선시대의 능침에는 아직도 전주이씨대동종약원에서 정례적으로 능제가 행해지고 있는 차이점을 보인다. 이러한 사실은 중국의 태묘가 현재 그 기능을 상실하였지만 조선시대의 종묘는 현재까지 그 기능을 유지하기 때문에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것과 같은 맥락을 이룬다. 이렇듯 중국과의 차이는 인간과 자연의 관계, 인간의 생사에 대한 이해방식 그리고 유교적 의례의 공간적 처리에 대한 주관적 해석 등의 관점에서 한국인의 고유한 정신적 입장이 반영된 결과라고 생각된다. 중국의 경우와 비교하여 볼 때 조선왕릉은 단순하면서도 부드럽고 과장되지 않은 인간미가 느껴지며 인공적 처리보다 자연질서 자체에 귀의하려는 한국적 취향이 느껴진다.

이렇듯 분위기 형성과 능 조성방식이 중국과 사뭇 다르다는 것은 동아시아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서 한국의 능만이 고유한 분위기와 형식을 갖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조선왕릉은 그러한 한국 능의 가장 전형적이고 수준 높은 성취를 보여준다. 이렇게 볼 때 조선왕릉은 그 물리적 형식, 현장에서의 심리적 느낌 그리고 거기에 깃들어 있는 정신에 있어서 세계적으로 고유한 가치와 의미를 지니고 있는 유산임을 드러내준다.
일본 천황릉과 비교
일본에서 황실은 화장법을 따르지 않고 시신을 매장하는 관습을 지니고 있지만, 때에 따라서는 화장을 하고 수습된 유골이나 재, 치아, 머리카락 등을 모시기도 하였다. 천황의 매장시설로 고분이 만들어진 시대는 3세기부터 7세기에 이르는 약 400년간을 대표적으로 꼽을 수 있다. 이 당시에는 전방후원분, 원분, 방분 등 여러가지 형태의 고분이 만들어졌다. 이 중 가장 유명한 것은 오사카에 위치한 5세기 중반~후반에 만들어진 닌토쿠 천황릉으로, 천황릉 중 최대 규모이며 세계3대 능묘의 하나로 일컬어진다. 그러나 7세기에 들어서면서 천황릉은 규모가 크게 축소되고 형태도 반구형의 단순한 분묘 형태로 바뀌는 등 급격하게 변화하게 되었고, 불교의 영향으로 고분이 쇠퇴하고 석탑 등이 이를 대신하게 되었다. 일본의 천황릉은 천황이 다시 권력을 장악하는 19세기말에 와서야 봉분을 조성하는 고분 형태의 능이 다시 나타나게 되었다.

일본 천황릉은 봉분을 네모난 울타리로 둘러싸고 그 앞으로 의례를 위한 넓은 단을 갖추고 길게 진입부를 배치하는 형태로 이루어졌다. 분구가 위치한 곳은 구릉지가 약간 돌출한 부분이 많은 편이지만 지형에 따라서 예외적인 경우가 허다해, 조선왕릉이 특정한 풍수적 조건을 고려해 왕릉의 입지를 선정하였던 것과 구분된다. 또한 일본 능묘의 경우 제사를 대비한 별도의 제례용 건물이나 봉분을 수호하는 석조 조각물을 갖추지 않았다는 점도 조선왕릉과의 차이점으로 들 수 있다.

무엇보다도 역사적으로 일본 황실의 경우 7세기 이후 1천년 가까운 기간 동안 불교전통이 강하게 작용하여 고분 형태의 능이 지속되지 않았다. 이에 반해 조선왕릉은 5백년 이상의 왕조 역사를 통해 일관된 원칙 아래 왕릉 조영이 지속되었다는 점이 차이점으로 두드러진다.
베트남 응우엔 왕조의 능과의 비교
베트남은 오랜 왕조의 역사를 지니고 있지만 왕릉 유적을 뚜렷이 남기고 있는 것은 마지막 왕조인 응우엔 왕조가 대표적이다. 응우엔 왕조는 19세기부터 1945년까지 이어진 비교적 짧은 수명의 왕조로, 7기의 왕릉이 있다. 이는 후에시 외곽에 자리 잡고 있으며 후에시의 도성유적과 함께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어 있다.

응우엔 왕조의 황제릉은 중국의 능침제도를 많은 부분 수용하였다. 중국과 베트남의 왕릉이 왕이 사후에도 계속적인 통치를 하도록 한 능원 조영이었다면, 조선시대의 왕릉은 예를 갖추기 위한 공간이었다는 점에서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응우엔 왕조의 능은 제일 밖에 홍문을 만들고 문 안 넓은 마당 좌우에 석인상과 동물상을 늘어서있게 했다. 그리고 봉분은 보성이 둘러싸도록 배치하였다. 다만 베트남은 전체 능역이 중국에 비해 작고 석물의 크기도 작은 편이며, 침전이나 명루, 보성 역시 규모 면에서 중국의 것보다 작다. 그러나 배치 구성 측면에서는 중국과 차이를 보인다. 중국의 능침제도가 1개의 축 상에 주요 시설들이 배치되는 형식이었다면, 응우엔 왕조의 능은 역대 왕에 따라 축의 수 변화가 다양하여 능의 공간구성방식이 왕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또한 응우엔 왕조는 능의 입구나 보성의 전면에 호수를 두고 돌아가도록 하거나 다리를 두어 건너가도록 하였다. 이러한 호수는 조선왕릉의 능을 감싸면서 흐르는 명당수와 비교되며, 이는 조선왕릉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능으로 들어가는 신성함과 경건함을 부여하고 있다.

또한 능 앞의 석인석을 비교해보면, 한국과 중국, 베트남은 기본적인 형태와 목적은 유사하지만 각 나라별로 고유한 특성을 갖고 있다. 이는 작품이 설치된 주변 환경, 작품의 크기, 재료, 인상, 세부 표현 등에서 차이가 나타난다. 중국은 거대한 크기와 사실적인 묘사가 특징적이라면, 베트남은 크기가 작고 뜰에 배치되어 있어 조각 장식품처럼 보인다. 이에 비하여 조선왕조의 석물은 잔디 언덕에 독립해서 높게 설치되어 야외조각과 같은 분위기가 느껴지며, 단순화된 형태와 화강석의 색상으로 인하여 은은하며 엄숙한 분위기가 특징이다. 특히 석인석의 경우 사각기둥 형태와 몸에 비해 큰 머리의 비례로 장엄미가 잘 나타나고 있다.
각 국의 문석인 비교
문석인 비교 테이블 - 구분, 명13릉, 청동릉, 베트남, 조선왕릉 으로 구성
구분 명13릉 청동릉 베트남 조선왕릉
사진 명13릉 문석인 이미지 청동릉 문석인 이미지 베트남 문석인 이미지 조선왕릉 문석인 이미지
국가 중국 중국 베트남 한국
소재지 북경시 창평구 천수산 하북성 준화현 창서산 베트남 후에시 서울특별시 강남구
제작시기 1409 1661 1841~43 1562
재료 대리석 대리석 대리석 화강석
지료경도 Mohs 3-4(방해석) 3-4(방해석) 3-4(방해석) 7(석영)
크기 약 3m 약 3m 약 1.6m 약 3.2m
형태 양관을 쓰고 홀을 든 직립상 관복을 입고 배에 손을 댐 관복에 홀을 들고 포를 입음 복두를 쓰고 홀을 든 직립상
위에서 보았듯이 유교문화권의 무덤은 커다란 봉분을 형성하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대개 봉분은 흙을 반원형으로 쌓아 올린 모습이다. 다만 이 봉분을 만들고 나서 그 주변부의 시설을 어떻게 만들어 가는가 하는 것은 각 나라 각 민족의 고유한 자연관과 세계관에 의해 달라졌다.

조선의 왕릉은 지하묘실을 두지 않고 봉분 속에는 시신을 안치한 관만 매장하였지만, 지상의 구조물들에서 다른 나라에서 볼 수 없는 특징을 간직하고 있다. 우선 조선왕릉은 중국처럼 한두 곳의 특정 지역에 집중해서 족분을 조성하는 것이 아니라, 풍수이론상 좋다고 평가되는 여러 곳에 산재해 있다. 또한 각각의 능은 풍수 이론에 의해 능을 감싸는 언덕을 보유하고 있다. 각 능은 봉분을 둘러싸고 능을 지키는 짐승과 관리들의 모습이 돌로 새겨져 봉분 주위에 배열되며, 능에서 치르는 제사에 대비한 정자각, 재실 등의 건축물들도 일정한 규칙에 의해 배치된다. 여기에는 한국인들이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쌓아온 미의식과 자연과 조화된 건축물을 만들려고 하는 독특한 가치관이 뚜렷이 나타나있다.

또한 한국은 유교가 지배층에서부터 사회 기층에까지 철저하게 뿌리내렸기 때문에 무덤에 대해 종교적인 차원과 유사한 중요한 가치를 부여해왔다. 따라서 최고 지배자인 왕들의 무덤 뿐 아니라 조상의 무덤이 각별한 존중을 받아왔으며, 일반 서민들에게 있어서도 무덤은 하나의 신앙처럼 소중히 취급되었다. 현재까지도 한국인에게 있어서 부모는 절대적인 존경의 대상이며 조상의 무덤은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는 집안의 가장 중요한 대상물이 되어 있다. 한국의 수많은 무덤 가운데도 가장 뛰어난 것은 다름 아닌 조선왕조의 왕릉으로, 유교가 정치, 사회적으로 최고의 덕목으로 수용되어 온 조선왕조에서 최고 통치자인 왕들의 무덤은 최고의 존경을 받는 대상이었다. 이런 점에서 조선왕릉은 유교문화권에서도 높은 문화적 지위를 지니고 있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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