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료마당

왕의생애

왕위를 계승할 자, 세자
조선시대 왕위 계승의 원칙에는 두 가지가 있었다. 우선 중전의 몸에서 태어난 첫째 아들이 왕위를 계승해야 하는 것이고, 왕이 될 사람은 덕이 있어야 한다는 원칙이 그 두 번째이다. 이 조건을 만족시키는 왕손은 '대를 이을 아들'이라는 의미의 세자(世子)로 책봉되어, 후계자로서의 준비에 만전을 기울여야 했다.
조선과 대한제국의 국왕과 황제 중에 위의 적장자 원칙에 따라 세자 책봉을 받고 왕위에 오른 임금은 문종, 단종, 연산군, 인종, 현종, 숙종, 순종 7명이다. 적장자는 아니지만 그 덕을 인정받거나 중전에게 아들이 없어 후궁의 아들이나 왕족으로서 왕위에 오른 임금은 19명이다. 의경세자(덕종), 순회세자, 소현세자, 효명세자(문조)가 세자의 신분으로 세상을 떠났고, 양녕대군, 연산군의 아들, 광해군의 아들은 폐세자가 되어 왕위에 오르지 못했다.
대궐의 정전에서 거행된 의식, 세자책봉례
세자를 책봉하는 임명서를 수여하는 의식을 '세자책봉례'라고 한다. 세자책봉례는 대궐의 정전에서 거행되었다.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에는 세자책봉례의 순서가 기록되어 있다. 첫 번째 북이 울리면, 의장을 갖추고 군사를 배치한다. 두 번째 북이 울리면, 문무백관과 종친들은 근정문 밖의 위(位)로 나아가고, 왕세자가 면복을 갖추고 등장한다. 세 번째 북이 울리면, 지위에 따라 종친과 문무백관이 동서로 줄지어 서며, 종이 울리다가 그치면 악기 연주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왕이 가마를 타고 나선다. 문무백관과 왕세자가 왕에게 차례로 사배(四拜)를 하며, 꿇어앉은 세자 앞에서 왕은 전책관을 통해 죽책문(竹冊文), 교명문(敎命文), 세자인(世子印)을 전해 준다.
죽책문은 대나무로 만든 임명장, 교명문은 세자에게 당부하는 훈계문, 세자인은 세자를 상징하는 도장이다. 세자에 책봉된 이후에는 중국 황제의 고명을 받았다. 그리고 성균관에 행차하여 제자로서 공자에게 인사를 드렸다.
왕이 되기 위한 훈련, 세자의 하루
세자의 자리에 오르면, 궁궐의 동쪽에 거처가 있다 하여 동궁(東宮), 혹은 계절 중 봄에 비유하여 춘궁(春宮)이라 불렸다. 책봉 후에는 세자익위사의 호위를 받으며 조선의 내로라하는 실력자들로 구성된 세자시강원의 관료들로부터 왕으로서 요구되는 식견과 능력을 기르는 교육을 받기 시작했다.
아침에 일어나면 의관을 정제하고 왕을 비롯한 왕실의 어른들에게 문안 인사를 가는 것이 공식 일과의 시작이었다. 문안 인사 후에는 조강, 주강, 석강으로 나뉘는 세자시강원의 강의를 들으며 유교 공부에 전념하였다.
그리고 틈틈이 말 타기, 활쏘기, 붓글씨 등 이른바 육예(六藝)를 연마하였다. 잠자리에 들기 전에는 왕실 어른들에게 다시 인사를 드림으로써 세자의 하루는 마감된다.
부왕을 대신한 정치, 대리청정
세자는 원칙적으로 정치에 관여해서는 안되며, 위와 같은 일과를 보내며 후계자로서의 자질을 기르는 것을 본분으로 삼아야 했으나, 부왕 대신 국사를 처리하는 대리청정을 하기도 하였다.
세종의 아들 문종, 영조의 아들 사도세자(장조), 순조의 아들 효명세자(문조)의 예가 그러하다.
조선시대 왕의 면복 이미지
선왕 장례의 한가운데, 세자의 왕위 계승
왕실 후계자로 정해진 세자는 언제 왕위를 물려받게 될까? 조선 왕조의 왕위 계승은 선왕이 세상을 떠나거나 왕의 자리에서 물러났을 때 이루어졌다. 건강 악화, 반정 등의 이유로 세상을 뜨기 이전에 왕의 자리에서 물러난 경우는 태조, 정종, 태종, 단종, 세조, 연산군, 광해군, 고종 8명의 경우에 불과하며, 나머지 19명의 왕은 모두 승하한 후 다음 왕에게 국새를 넘겨주었다. 따라서 조선 왕 대부분의 즉위식은 선왕의 장례 기간에 이루어졌다.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에서는 이 의식을 국장절차 중 하나의 과정으로 설명하고 있는데, 사위(嗣位), 반교서(頒敎書)라고 한다.
어좌에 오르는 순간, 새 왕의 등극
왕의 즉위식은 선왕이 승하한 지 6일이 지난 후 거행된다. 선왕의 시신을 모신 빈전의 동쪽에 왕세자가 머물 여막을 치고, 유언장과 국새를 여러 가지 의장물과 함께 설치하여 새 왕에게 국새를 건네 줄 준비를 한다. 왕세자는 여막 안에서 입고 있던 상복을 벗은 다음 예복인 면복(冕服)을 갈아입고 빈전의 뜰로 나아간다. 그리고 선왕의 유언장과 국새를 받아 각각 영의정과 좌의정에게 전해주고는 여막으로 돌아간다.
여막에서 다시 나온 왕세자는 붉은 양산과 푸른 부채를 든 자들에게 둘러싸여 가마를 타고 어좌에 설치된 정전으로 향한다. 이리하여 왕세자가 오른쪽 계단을 통해 어좌에 올라앉는 순간, 새로운 왕이 탄생하게 된다. 즉위교서가 반포된 후 정전에서는 향을 피우고, 즉위식장을 가득 매운 대소 신료들은 두 손을 마주잡아 이마에 얹으면서 “천천세(千千歲).”라고 외친다. 이는 왕조의 운명이 오래도록 영원하라는 뜻이다.
왕의 즉위 표 - 왕, 출생년도, 즉위년도, 즉위시 나이, 즉위장소, 재위기간으로 구성됨
출생년도 즉위년도 즉위시 나이 즉위장소 재위기간
1대 태조 1335 1392 58세 개성 수창궁 7년
2대 정종 1357 1398 42세 경복궁 근정전 2년
3대 태종 1367 1400 34세 개성 수창궁 18년
4대 세종 1397 1418 22세 경복궁 근정전 32년
5대 문종 1414 1450 37세 동별궁 빈전 2년
6대 단종 1441 1452 12세 경복궁 근정문 3년
7대 세조 1417 1455 39세 경복궁 근정전 13년
8대 예종 1450 1468 19세 수강궁(현재 창경궁) 중문 1년
9대 성종 1457 1469 13세 경복궁 근정문 25년
10대 연산군 1476 1494 19세 창덕궁 인정전 11년
11대 중종 1488 1506 19세 경복궁 근정전 39년
12대 인종 1515 1544 30세 창경궁 명정전 8개월
13대 명종 1534 1545 12세 경복궁 근정문 22년
14대 선조 1552 1567 16세 경복궁 근정전 41년
15대 광해군 1575 1608 34세 정릉동 행궁(현재 덕수궁) 서청 15년
16대 인조 1595 1623 29세 경운궁(현재 덕수궁) 27년
17대 효종 1619 1649 31세 창덕궁 인정문 10년
18대 현종 1641 1659 19세 창덕궁 인정문 15년
19대 숙종 1661 1674 14세 창덕궁 인정문 46년
20대 경종 1688 1720 33세 경덕궁(현재 경희궁) 숭정문 4년
21대 영조 1694 1724 31세 창덕궁 인정문 52년
22대 정조 1752 1776 25세 경희궁 숭정문 24년
23대 순조 1790 1800 11세 창덕궁 인정전 35년
24대 헌종 1827 1834 8세 경희궁 숭정문 15년
25대 철종 1831 1849 19세 창덕궁 인정문 14년
26대 고종 1852 1863 12세 창덕궁 인정문 34년
대한제국 1대 고종 1852 1897 46세 환구단 9년
대한제국 2대 순종 1874 1907 34세 경운궁 돈덕전 3년
단종의 능 장릉 이미지
호화로운 생활과 비례하지 않았던 왕의 건강
519년의 긴 세월을 이어온 조선과 대한제국에는 모두 27명의 왕과 황제가 존재하였다. 왕들은 장엄한 궁궐에서 화려한 의복을 입고, 조선의 내로라하는 명의들이 궁궐에서 늘 왕의 건강을 살폈다. 그러나 왕들은 호화로운 환경에서도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그다지 건강하지 못하였다.
조선 왕들의 평균 수명은 44세로 주로 눈병, 종기, 중풍 등의 병을 겪다가 세상을 떠났다.
만기(萬機)를 처리해야 하는 왕의 직업병
일단 왕위에 오르면 그 뒤로는 정신없이 바쁜 왕의 일과가 시작된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하루 종일 처리해야 할 업무가 산처럼 많기 때문에 왕이 집무하는 일들을 만 가지 일이라는 뜻의 “만기(萬機)”라고 하였다. 게다가 왕의 집무는 철저히 정신노동이었다. 주로 앉아서 신료들을 접견하고 공문서를 읽었으며, 자리를 이동할 때에는 가마를 이용하였다. 격구나 활쏘기 등의 간단한 활동을 제외하고는 운동할 기회가 거의 없었다. 따라서 혈액 순환이 원활히 되기가 어려웠고, 당뇨와 고혈압에 쉽게 걸렸다. 눈병이나 종기가 나면 쉽게 낫지 않았으며, 이는 결국 왕을 죽음으로 몰고 가는 원인이 되었다. 실제로 세종과 숙종이 당뇨병으로, 태조, 정종, 태종이 중풍으로 인한 뇌출혈로, 문종, 성종, 효종, 정조, 순조가 종기로 세상을 떠났다.
유배지에서 생을 마감한 정치사의 희생양
그런가 하면 질병과는 상관없이 정치사의 희생양으로 운명을 달리한 왕도 있다.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듯이 6대 임금 단종은 삼촌인 수양대군에게 정권을 빼앗기고 영월로 유배당했다. 삼면이 강으로 둘러싸여있어 감옥이나 다름없는 영월의 청령포에서 유배생활을 하다가, 결국 17세의 어린 나이에 사약을 받고 승하하였다.
이로서 단종은 가장 어린 나이에 억울하게 세상을 떠났다. 단종과는 다른 경우이나 연산군과 광해군도 반정에 의해 폐위되고 유배지에서 세상을 떠났다.
종묘 정전의 감실 이미지
왕의 이름
왕이란 군주제가 시행되던 시기의 절대 권력자로서 동서를 막론하고 매우 특별한 존재로 인식되었다. 왕의 이름은 많게는 여섯 개까지 있었다.
태어나면서 붙여지는 이름
일반 백성들과 마찬가지로 왕도 태어나면서 이름이 붙여진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이방원(李芳遠), 이도(李祹), 이척(李坧) 등이 왕의 이름이다. 왕의 이름을 보면, 태종, 단종을 제외하고는 모두 외자를 쓰고 있는데, 여기에는 특별한 이유가 있다. 임금의 이름은 누구도 함부로 부를 수 없으며, 다른 용도라고 하더라도 왕의 이름에 쓰인 문자를 문서에 쓸 수 없도록 정해져 있었다. 따라서 왕이 될 가능성이 있는 왕자의 이름은 실생활에서 잘 쓰이지 않는 하나의 한자만을 써서 만든 것이다.
관례 때 받는 이름과 성향을 나타내는 이름, 자(字)와 호(號)
조선시대에는 일반적으로 성인이 되어 관례를 치르면 원래의 이름 외에 성인으로서의 이름을 다시 부여받게 된다. 이를 ‘자’라고 한다. 이는 원래의 이름을 공경하여 마구 부르기 꺼려하는데서 비롯된 복명속(復命俗 : 두 가지 이상의 이름을 갖는 풍속)을 따른 것이다. 한편 자신이 스스로를 표시하기 위해 붙이거나 스승 또는 친구들이 붙여주는 이름인 호(號)가 있다. 태조의 호는 송헌(松軒), 정조의 호는 홍재(弘齋)이다.
공덕을 기리는 이름, 시호(諡號)와 존호(尊號)
왕이 세상을 떠나면 신하들은 왕의 일생과 업적을 평가하여 그에 알맞은 이름을 지어 올린다. 이를 시호라고 한다. 이때 올리는 시호의 글자수는 8글자가 된다. 그리고 세상을 떠난 왕의 행장을 적어 중국의 황제에게 보내 중국조정에서 시호를 정해준다. 중국에서 받은 시호를 보면 세종의 시호는 장헌(莊憲)이고, 성종의 시호는 강정(康靖)이다. 또한 공덕을 기리기 위해 따로 존호를 지어 올리는데, 시호와 마찬가지로 8글자를 올린다. 존호는 왕이 살아있었을 때와 세상을 떠난 후 모두 올릴 수 있다.
종묘에서 부르는 이름, 묘호(廟號)
왕이 세상을 떠난지 27개월이 지나면, 왕의 신위를 종묘로 모셔오는데, 이 때 ‘종묘에서 부르는 호칭’이라는 의미의 묘호가 정해진다. 태종, 세종, 숙종, 영조 등 우리에게 가장 친숙한 왕의 이름이 바로 묘호이다. 묘호 역시 시호와 마찬가지로 왕의 일생을 평가하여 결정하게 된다.
묘호는 시호와 다르게 조(祖) 혹은 종(宗)을 붙여 짓는데, 보통 조는 공이 탁월한 왕에게, 종은 덕이 출중한 왕에게 붙이는 것이 관례이다. 그러나 조선에서는 새로운 종통이 시작되었거나(태조, 세조, 인조), 종(宗)에서 조(祖)로 추존(선조, 영조, 순조), 또는 황제로 추존될 때(정조)는 조(祖)를 사용한다.
정전이미지 - 상세내용 하단 참조

정전

정전은 종묘의 중심이 되는 건축물로, 역대 왕의 신위(신주)를 모시고 있다. 1935년(태조 4) 대실 7칸의 규모로 처음 지어졌고, 세월이 흐르고 모셔야 할 신위가 늘어남에 따라 꾸준히 증축되어 현재의 모습에 이르렀다. 동서로 길게 뻗은 정전의 모습은 유려함과 장엄함을 느낄 수 있다. 서쪽 첫 번째 칸에 1대 태조의 신위를 모시고, 다음으로 태종, 세조, 성종을 비롯한 왕과 왕비 49위 신위를 19개의 감실에 모시고 있다. 감실 내부는 중앙에 신탑, 그 뒤에 신주를 모신 신주장(감실), 그 좌우로 각각 죽책과 금보, 옥보를 넣어둔 책장과 보장을 배치하였다.

종묘의궤(宗廟儀軌) 신실도 - 왼쪽에는 시책, 가운데에는 신주, 오른쪽에는 시보를 모셨다.

영녕전
영녕전 - 신실, 신위(묘호), 능호
신실 신위(묘호) 능호
1실 태조고황제 건원릉
  (健元陵)
신의고황후 제릉(薺陵)
신덕고황후 정릉(貞陵)
2실 태종 헌릉(獻陵)
원경왕후
3실 세종 영릉(英陵)
소헌왕후
4실 세조 광릉(光陵)
정희왕후
5실 성종 선릉(宣陵)
공혜왕후 순릉(順陵)
정현왕후 선릉(宣陵)
6실 중종 정릉(靖陵)
단경왕후 온릉(溫陵)
장경왕후 희릉(禧陵)
문정왕후 태릉(泰陵)
7실 선조 목릉(穆陵)
의인왕후
인목왕후
8실 인조 장릉(長陵)
인열왕후
장열왕후 휘릉(徽陵)
9실 효종 영릉(寧陵)
인선왕후
10실 현종 숭릉(崇陵)
명성왕후
영녕전 - 신실, 신위(묘호), 능호
신실 신위(묘호) 능호
11실 숙종 명릉(明陵)
인경왕후 익릉(翼陵)
인현왕후 명릉(明陵)
인원왕후
12실 영조 원릉(元陵)
정성왕후 홍릉(弘陵)
정순왕후 원릉(元陵)
13실 정조선황제 건릉(健陵)
효의선황후
14실 순조숙황제 인릉(仁陵)
순원숙황후
15실 추존문조익황제 수릉(綏陵)
신정익황후
16실 헌종성황제 경릉(景陵)
효현성황후
효정성황후
17실 철종장황제 예릉(睿陵)
철인장황후
18실 고종태황제 홍릉(洪陵)
명성태황후
19실 순종효황제 유릉(裕陵)
순명효황후
순정효황후
영녕전 안내 이미지2

영녕전

영녕전은 정전의 서북쪽에 자리 잡고 있다. 조선을 개국하고 세월이 흐르자 세상을 떠난 왕도 정차 많아지고, 이에 따라 신위(신주)를 모실 건물을 늘리거나 새로 지어야 할 필요가 생겼다. 따라서 1421년(세종 3) 정종의 신주를 정전에 모실 때 이 곳 영녕전을 새로 지어 추존 목조의 신주를 옮겨 모셨다. 이후 정전에서 계속 모실 수 없는 왕과 왕비의 신주를 옮겨 모시게 되었다. 현재 정종, 문종을 비롯하여 각 왕과 왕비의 신주를 옮겨 모시게 되었다. 현재 정종, 문종을 비롯하여 각 왕과 왕비 34위의 신주가 16개의 감실에 모셔져 있다. 17세기 중기 건축양식을 보여주는 이 건물은 제사를 드리는 곳이라는 목적에 맞도록 구조와 장식·색 등이 간결하고 장중한 느낌을 주도록 만들었다.

종묘의궤(宗廟儀軌) - 종묘 전도의 영녕전 부분

영녕전
영녕전 - 신실, 신위(묘호), 능호
신실 신위(묘호) 능호
1실 추존목조 덕릉(德陵)
효공왕후 안릉(安陵)
2실 추존익조 지릉(智陵)
정숙왕후 숙릉(淑陵)
3실 추존도조 의릉(義陵)
경순왕후 순릉(純陵)
4실 추존환조 정릉(定陵)
의혜왕후 화릉(和陵)
5실 정종 후릉(厚陵)
정안왕후
6실 문종 현릉(顯陵)
현덕왕후
7실 단종 장릉(莊陵)
정순왕후 사릉(思陵)
8실 추존덕종 경릉(敬陵)
소혜왕후
9실 예종 창릉(昌陵)
장순왕후 공릉(恭陵)
안순왕후 창릉(昌陵)
영녕전 - 신실, 신위(묘호), 능호
신실 신위(묘호) 능호
10실 인종 효릉(孝陵)
인성왕후
11실 명종 강릉(康陵)
인순왕후
12실 추존원종 장릉(章陵)
인헌왕후
13실 경종 의릉(懿陵)
단의왕후 혜릉(惠陵)
선의왕후 의릉(懿陵)
14실 추존진종소황제 영릉(永陵)
효순소황후
15실 추존장조의황제 융릉(隆陵)
헌경의황후
16실 의민황태자
의민황태자비
?
이 페이지의 정보와 사용편의성에 만족하시나요?
TOP